파운드리 서울은 2023년 7월 21일부터 9월 16일까지 베를린을 기반으로 활동하는 마틴 그로스(Martin Gross)의 국내 최초 개인전 <>을 개최한다. 신작 회화 12점, 2개의 장소 특정적인 영상 작업과 더불어 처음으로 공개되는 대형 애니메이션 영상 작업으로 구성된 이번 전시는 이미지, 기호, 사운드 등 다양한 형태의 정보를 감각적으로 인식 및 재구성하여 무한히 확장되는 화면으로 구축하는 마틴 그로스의 작품 세계 전반을 조망하고자 한다.
그로스의 작업은 흑백의 건축적 드로잉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시각적 언어, 색조, 테크닉을 발전시키며 대형 설치작업까지 확대된 그로스의 다양한 예술적 실천에서, 공간의 구조와 정보를 평면 위에 나타내는 ‘지도 그리기’ 개념의 드로잉은 여전히 중심적인 역할을 한다. 그로스의 작품에는 이모지, 밈, 텍스트, 광고 문구 등 다양한 모티브가 담겨있다. 비언어적 기호로 작용하는 이들은 작가가 자신의 주변에서 포착하고 추출한 이미지로, 잘라내기 기법(Cut-up technique), 몽타주 기법 등의 편집을 통해 기존의 맥락에서 분리되며 변형된다. 각각의 요소들은 무작위적 배열에 기반한 우연성 속에서 새로운 맥락으로 재탄생된다. 작가는 이 과정에서 자신의 작품 속에 위치한 각 요소들을 일종의 ‘하이퍼텍스트(Hypertext)’로 비유하며, 이들은 화면 안에서 미술사, 인터넷 환경, 팝 문화 등의 무한한 서사로 이어진다. 동시에, 자율적인 움직임을 부여 받은 각 요소들의 무작위적인 조합은 이와 같은 일련의 과정 속에서 자유로운 미학적 구조를 만들어 낸다.
<>의 전시명은 ‘인터넷의 아버지’라 불리는 테드 넬슨(Ted Nelson)이 처음으로 구상한 ‘하이퍼텍스트’의 개념과 원리를 설명하기 위해 사용한 단어 ‘dream file’에 기인한다. 이는 마치 하이퍼텍스트처럼, 관람객의 시선과 개인적 경험에 따라 사고의 흐름이 자율적이면서도 유기적으로 연결되는 그로스의 작업 세계에 대한 실마리이자 넬슨에 대한 오마주이다.
그로스는 수많은 이미지와 정보와 패턴을 마주하며 오늘날 우리가 겪는 경험들을 과적재된 화면을 통해 시각적으로 묘사한다. 동시에 보는 이로 하여금 마치 앨리스의 토끼굴처럼 각자 만의 공간으로 넘어갈 수 있도록 수많은 장치를 위치시킨다. 다양한 온라인 현상들과 환상적이고 감성적인 요소가 중첩된 화면 속 파편처럼 흩어진 이미지들은 어느덧 자유롭게 결합되며 보는 이의 경험을 통해 비로소 확장되고 완성되는 것이다. (2023)의 몽환적인 화면, (2023)의 노을, (2023)의 제목을 따라 문득 떠오르는 풍경과 분위기를 되새기듯 상념 속을 헤매다 보면, 오래전 들었던 노래처럼 언젠가 방향 없는 묘한 그리움이 될 현재로 도착한다.
그로스의 작품 내에서 텍스트는 새로운 생각과 개념을 발생시킬 뿐 맥락의 타당성이나 사전적 의미를 보장하진 않는다. 그저 작가가 감각적으로 인식하는 내적 경험을 시각적으로 전달하는 외적인 표현으로서의 변환이다. 온라인 상에서 흔히 사용되는 줄임말 ‘ILYSM(I Love You So Much)’를 거꾸로 작성한 제목이 시사하듯, (2023)에서는 시각언어에 대한 그로스의 접근 방식이 여실히 드러난다. 그에게 텍스트란 어휘 그 자체로 독자성을 가지면서, 동시에 본질적인 의미나 형식 상의 속박에서 벗어날 수 있는 무한한 가능성을 가진 재료인 것이다. 가장자리를 따라 이어지는 ‘ai fil laique kkkkkk’가 ‘I feel like kkkkkk’를 순수하게 청각적으로 접근하여 음성기호로 표현한 것이 그러하다. 텍스트 – 이미지 – 사운드의 변환 과정에서 발생하는 필연적인 오류들은 직관적으로 이해하지 못하는 순간에도 작가와 관객의 시선 속에서 새로운 의미가 생겨나고 있는 것이다.
5분가량의 대형 애니메이션 작품 (2023)은 작가가 직접 작성한 문구에서 가벼운 농담에 이르기까지 7미터 높이의 벽을 가득 채운 텍스트들이 다양한 형태로 등장하고 변형된다. 검정 배경과는 대조적으로 눈에 띄게 선명한 주황색 텍스트는 시선을 사로잡기 위해 의도된 광고 이미지를 연상시키며 관람 주체와 공간과의 관계를 새롭게 형성한다. (2023)은 대형 설치작업으로 확장되어 온 작가의 첫 대형 미디어 설치작업으로, 이미지와 텍스트, 텍스트와 사운드, 사운드와 이미지의 관계를 통해 관객에게 새로운 감각을 전달하며, 전시장 어디에서도 시각적으로, 청각적으로 경험할 수 있는 이 대형 작업은 전시장 내 마주보고 있는 작품 (2023), 그리고 작품 내 등장하는 마지막 문구와 동명의 작품인 (2023)와 연결되며 새로운 의미와 감성을 발생시킨다.